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드난 멘데레스 (문단 편집) === 민주당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후, 튀르키예 정부는 전쟁 기간 동안 억눌렀던 사회적 불만을 더이상 억제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당시 [[이스메트 이뇌뉘]] 대통령을 중심으로 장기간 권력을 쥐고 있던 공화인민당은 서구화, 세속주의를 내세우며 이슬람교를 억누르고 급속한 산업화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소농들은 급속한 산업화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했다. 가령 튀르키예의 전력 생산은 1923년부터 1943년까지 10배 증가했지만, 전력 생산량의 80% 가량은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의 3대 도시로 흘러갔고, 4만 개에 달하는 농촌 마을에서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은 10개에 불과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져 자칫했다간 정권마저 위험하다는 걸 감지한 이뇌뉘 대통령은 1945년 5월 대지주의 토지 과점을 제한하고 소농에 더 많은 토지를 분배하는 내용의 토지개혁법을 의회에 상정했다. 그러자 공화인민당 내부의 대지주들이 반발했다. 특히 아이든 도의 대지주였던 멘데레스는 반대파를 조직하고 [[토지개혁]]은 토지를 쓸데없이 잘게 쪼개 비효율만 양산할 거라면서 정부가 너무 권위적으로 일을 처리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토지개혁법이 통과되자, 멘데레스는 [[젤랄 바야르]], 레피크 코랄탄, 푸아트 쾨프릴뤼와 함께 정부 구조를 보다 민주적으로 개편하라는 요구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를 '4인 제안서(Dörtlü Takrir)’라고 한다. 이뇌뉘 대통령은 요구안을 거부했지만, 국내에 팽배한 불만과 대외적 위신을 고려해 1947년 선거를 다당제 자유선거로 치르겠다고 약속했다. 멘데레스는 야당을 창당해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지자 다른 3명과 함께 공화인민당을 탈당하고 1946년 1월에 민주당을 창당했다. 공화인민당은 처음에는 민주당 창당에 대해 환영의사를 밝혔지만, 전국에서 민주당에 대한 지지세가 날로 높아지자 위협을 느끼고 선거를 1947년에서 1946년 7월로 앞당겼다. 결국 민주당은 반년 밖에 주어지지 않는 선거 준비 기간만이 주어졌지만, 그래도 전체 465석 중 62석을 확보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후 양당은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총리 레제프 페케르는 민주당과의 협치를 전면적으로 거부했고 [[공산주의]]에 우호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멘데레스는 아타튀르크 이래로 공화인민당이 시행하고 있는 계획경제체제는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하며 경제 개발을 위해서는 정부의 개입이 아니라 사기업들의 경제 활동을 허용해야 한다고 맞섰다. 1947년, 이뇌뉘 대통령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의 시선을 의식하고 민주당과의 협치를 거부하던 페케르 총리를 사임시킨 뒤 좀 더 온건한 성향의 하산 사카를 총리에 임명시켰다. 그리고 공화인민당은 민주당의 경제자유화 정책에 협조하고 토지개혁안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하는 등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정부는 중공업 우선주의에서 경공업, 소비재, 농촌기업을 지원하는 것으로 경제정책을 개편해 아타튀르크 노선으로부터 후퇴했음을 보여줬다. 이에 고무된 민주당은 1950년 5월에 다가올 선거를 총력을 다해 준비했고, 그 결과 민주당은 1950년 5월 선거에서 53.4%를 득표해 39.8% 득표에 그친 공화인민당을 물리치고 집권에 성공했다. 또한 민주당은 전체 465석 중 408석을 확보했고, 공화인민당은 69석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군부는 이뇌뉘 대통령에게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종용했지만, 이뇌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왔다. [[젤랄 바야르]]는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등극했고, 멘데레스는 총리에 선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